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 국내 종교단체에서 주장하는 종교 인구를 합하면 국민 전체 인구보다도 많다는 ‘종교 백화점’ 같은 한국에서 국민 대다수는 의외로 믿는 종교가 없어도 선한 사람이라면 극락이나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나왔다.

유교의 가부장적 특징과 종교적 성향도 전반적으로 크게 약화되면서 남성의 권위가 가파르게 추락하고 있는 현상을 보였다.

이같은 사실은 한국갤럽이 8일 발표한 ‘2004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설문조사에서 드러났다. 한국갤럽은 지난해 1월 13∼31일 만 18세 이상 전국(제주도 제외) 성인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가구방문을 통한 1대1 개별 면접을 실시했다. 표본 오차는 ±2.5%포인트.(95% 신뢰수준)

한국갤럽이 ‘종교를 믿지 않으면 선한 사람도 극락이나 천국에 갈 수 없다’라는 물음에 대해 응답자의 71.5%가 ‘아니다(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반면 ‘그렇다(갈 수 없다)’는 응답은 18.5%에 그쳤다.

또 ‘극락이나 천국은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다’는 항목에는 ‘그렇다’라는 대답이 63.4%, ‘아니다’라는 답변이 23.9%인 것으로 나와 국민의 현세중심적 사고가 큰 것으로 조사됐다.

호주제 폐지 등 사회 흐름과 맞물려 가부장적 질서와 부부유별(夫婦有別) 등 국민의 유교적 성향은 눈에 띄게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특히 막연하게 좁아진 것으로 알려진 남편들의 성역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 수치상으로 확인돼 남편들의 고루한 사고에 일대 경종을 울리고 있다.

예컨대 ‘집안의 남자 어른이 주도권을 가져야 집안 질서가 바로 선다’는 의견에 대해 ‘동의한다’는 응답은 51.6%로 1984년 조사 결과(69.7%)보다 18.1%포인트 감소했고, ‘남편과 아내가 하는 일은 마땅히 구분돼야 한다’는 물음에는 수긍하는 응답이 39.4%로, 20년 전에 비해 무려 33.5%포인트나 줄었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선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지지하는 응답 비율도 45.7%로 1984년 조사 결과(59.8%)에 비해 14.1%포인트 감소했다. 나머지는 ‘태어날 때부터 선과 악이 있다’(31.4%), ‘태어날 때부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20.8%) 등 순이었다.

정성수 기자 hulk@segye.com